공공미술에 대한 상식을 회복하자 -월간문화연대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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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03 17:14
공공미술에 대한 상식을 회복하자 -미술인회의 기사 펌
월간 문화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새 예술정책의 공공미술제도 시안은 크게 미술장식 개념을 공공미술로 확대하고 제도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그간 미술장식품과 관련된 각종 비리사건들이 있어왔고 심의와 관계된 잡음들도 끊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지난 정부에서도 비슷한 골격의 개정안이 의원입법으로 논의되었다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다른 사안들에 밀려 무산된 적이 있는데 공공성 개념의 도입, 기금제를 비롯한 건축주 의무이행 방법 다양화, 공공부문 요율 상향 조정 등 현재 시안과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내용들은 이미 1998년 문화정책개발원에서 진행한 미술장식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를 비롯한 정책 논의들과 문화연대 및 과거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미술인 협의회 등 시민 사회에서 지적된 내용들이기도 하다. 또한 미술잡지나 건축관련 잡지들에서 기획한 미술장식품에 대한 논의들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이번의 시안은 그 골격에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즉흥적으로 고안된 안이 아니며 비교적 장기간의 논의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논란이 일고 있는가?
시안에 대한 미술인들의 의견은 지난 5월 21일 문광부에서의 토론을 통해 일차 개진되었다. 미술인회의를 제외하고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놀라웠던 것은 크게 보아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시안에 대해 모든 각도에서 문제제기가,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는 점이다. 그것을 두고 그간 미술장식이라는 비즈니스가 얼마나 폐쇄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필자가 거꾸로 미술계의 폭넓은 여론에 귀를 막고 지냈는지 순간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협회를 비롯하여 화랑협회, 목우회, 전업작가회 등의 단체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좁은 지면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전방위적이었기 때문에 요약하기 힘들지만 공통된 견해는 정책입안 과정상의 문제점을 비롯하여 시장 규모의 축소, 이에 따른 미술인 지원 효과 감소, 공공미술센터라는 기관으로의 권력집중 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 이전에 새로운 제도에 접근하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쟁점은, 우선 기존 제도의 공공적 성격 여부에 대한 것이다. 반대의견에서는 그것을 건축주의 사적인 영역으로 보았고, 공공적 성격이 있다 하더라도 미술인 지원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부에서 제기된 \'미술장식품과 공공미술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개진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비록 사적으로 소유한다 하더라도 공중이 이용한다는 점에서 공공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 하나는 공공미술센터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것이다. 필자가 파악하기로 센터는 기금으로 조성되는 공공부문 출처의 자금을 집행, 관리하는 기관이다. 센터가 존재한다고 해서 작품 심의나 프로젝트 선정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서 제작, 설치와 같은 프로젝트 수행 행위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센터와 같은 기관을 신설하는 것이 옥상옥을 짓는 것과 같아서 권력기관화 될 우려가 있다거나, 심지어 예술인들을 일괄 관리하려는 발상이라는 견해는 공공부문의 관리, 집행 기능 자체에 대해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밖에 기금을 조성할 옵션제의 유효성, 요율의 타당성, 중개기관 양성화의 방향과 방법, 새로운 공공미술의 범주에 해당하는 작품, 혹은 프로젝트의 범위, 공공미술 센터의 운영 방안, 센터와 기존에 심의를 주관했던 지자체의 관계 등 어려운 문제들이 많고 작품 가격 산정의 구체적인 기준, 중개기관 등록 요건 및 수수료 요율과 같은 세부적이면서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있는 부분들도 이견이 크다. 아마도 공공부문의 요율을 상향 조정한다는 내용 외에는 모두 문제시된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논란은 결국 공공 장소에서의 미술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문광부 포럼에서 드러났듯이 사실 기존에 미술장식품을 주도해 온 미학 개념은 개인주의, 혹은 사회계약의 틀을 맴돌고 있다. 건물에 세워지는 작품은 건축주와 작가의 사적 계약에 근거하며, 그것이 공공성을 획득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인 관객들의 반응까지 포함하는 시장에서의 자율적인 조정의 결과이지 국가 기관이 개입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의 이전이나 처분과 같은 소유권행사에 해당하는 문제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개정안이 사적인 창작과 작품 소유를 배척하기 위해 시도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적인 계약 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들, 가격기구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때문에 공공성 개념을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품 설치 장소와 관련된 부분이 대표적이다. 현재 많은 미술장식품들이 건물 주출입구 주변에 옹색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문패조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이는 토지경계선과 관계된 제한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작품을 기증하지 않으면 사유지 내에 설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제 장소를 찾지 못하고 불필요한 곳에 설치되고 있으며, 시민들의 접근도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또한 작품 관리, 설치 후 관객의 반응을 모니터하고 홍보하여 연구의 자료로 활용한다든가 하는, 공공영역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제들은 지금과 같이 각각의 경우들이 뿔뿔이 흩어진 채로 체계적인 정보수집도 불가능한 상태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공공성이 좋은 사례들을 확장해 나가면서 비로소 창조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작가의 독립적인 창작과 건축주의 사적인 소유 등 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신화에 빠져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는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반응은커녕 ‘시각공해’라는 여론에까지 직면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각종 세부적인 문제들을 두고 갈등이 불필요하게 확산되는 것보다는 우선 새로운 시안이 기존 형태의 미술장식을 그 안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공공미술의 본 궤도에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의미에서 공공부문에 선도적인 역할을 요구해야 하고 미술인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사실 외국의 경우 공공미술은 그 이름이 의미하듯 공공부문에서 먼저 시작된 것에 반해 우리의 경우에는 미술장식이라는 이상한 이름 하에 민간 부문에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공공미술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공공부문 요율을 1%로 상향 조정하는 것 이외에 도로, 항만, 신도시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에까지 그 대상을 확대해야 하고, 새로운 실험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를 요구해야 한다.
본 정책시안의 주된 목적이 ‘협소한 장식 개념에 한정되어 있는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를 공공미술제도로 전환’하려는 것인데 반해 세부 내용은 상당 부분이 기존의 미술장식품 개념에 얽매여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중개업체 등록제의 시행이라든가, 민간건축주의 부담을 덜기 위한 새로운 요율제 등은 모두 기존 미술장식품 제도가 양산한 비리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행 이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공공미술센터의 경우도 현재로서는 주로 물리적인 작품의 설치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사업 진행 및 관리가 주된 업무가 될 전망이다. 이런 제도 하에서 길거리의 퍼포먼스나 거리의 행사, 주민 자치 토론 프로그램의 조직, 대안 화폐의 실험과 같은 갖가지 창조적인 공적 개입 프로젝트가 공공미술제도의 지원을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정책의 구상과 추진에 있어서 부딪히는 현실적 고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그와 같은 제도정비가 형식적 관점에 갇힐 경우 오히려 공공미술의 맥락을 협소하게 규정함으로써 그 용어를 하나의 장르와 같은 것으로 전락시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의 논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여부는 미술인들에게 21세기 문화지형의 창조를 위한 하나의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순수예술의 위기와 같은 염불을 외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문제들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시민사회의 성숙도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의미 있게 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월간 문화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새 예술정책의 공공미술제도 시안은 크게 미술장식 개념을 공공미술로 확대하고 제도 운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그간 미술장식품과 관련된 각종 비리사건들이 있어왔고 심의와 관계된 잡음들도 끊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지난 정부에서도 비슷한 골격의 개정안이 의원입법으로 논의되었다가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다른 사안들에 밀려 무산된 적이 있는데 공공성 개념의 도입, 기금제를 비롯한 건축주 의무이행 방법 다양화, 공공부문 요율 상향 조정 등 현재 시안과 비슷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내용들은 이미 1998년 문화정책개발원에서 진행한 미술장식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를 비롯한 정책 논의들과 문화연대 및 과거 공공미술제도 도입을 위한 미술인 협의회 등 시민 사회에서 지적된 내용들이기도 하다. 또한 미술잡지나 건축관련 잡지들에서 기획한 미술장식품에 대한 논의들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이번의 시안은 그 골격에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즉흥적으로 고안된 안이 아니며 비교적 장기간의 논의를 거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논란이 일고 있는가?
시안에 대한 미술인들의 의견은 지난 5월 21일 문광부에서의 토론을 통해 일차 개진되었다. 미술인회의를 제외하고는 반대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상당히 놀라웠던 것은 크게 보아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시안에 대해 모든 각도에서 문제제기가, 격렬한 반대가 쏟아졌다는 점이다. 그것을 두고 그간 미술장식이라는 비즈니스가 얼마나 폐쇄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필자가 거꾸로 미술계의 폭넓은 여론에 귀를 막고 지냈는지 순간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미술협회를 비롯하여 화랑협회, 목우회, 전업작가회 등의 단체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좁은 지면에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전방위적이었기 때문에 요약하기 힘들지만 공통된 견해는 정책입안 과정상의 문제점을 비롯하여 시장 규모의 축소, 이에 따른 미술인 지원 효과 감소, 공공미술센터라는 기관으로의 권력집중 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 이전에 새로운 제도에 접근하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쟁점은, 우선 기존 제도의 공공적 성격 여부에 대한 것이다. 반대의견에서는 그것을 건축주의 사적인 영역으로 보았고, 공공적 성격이 있다 하더라도 미술인 지원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부에서 제기된 \'미술장식품과 공공미술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개진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은 비록 사적으로 소유한다 하더라도 공중이 이용한다는 점에서 공공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 하나는 공공미술센터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것이다. 필자가 파악하기로 센터는 기금으로 조성되는 공공부문 출처의 자금을 집행, 관리하는 기관이다. 센터가 존재한다고 해서 작품 심의나 프로젝트 선정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서 제작, 설치와 같은 프로젝트 수행 행위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센터와 같은 기관을 신설하는 것이 옥상옥을 짓는 것과 같아서 권력기관화 될 우려가 있다거나, 심지어 예술인들을 일괄 관리하려는 발상이라는 견해는 공공부문의 관리, 집행 기능 자체에 대해 상당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밖에 기금을 조성할 옵션제의 유효성, 요율의 타당성, 중개기관 양성화의 방향과 방법, 새로운 공공미술의 범주에 해당하는 작품, 혹은 프로젝트의 범위, 공공미술 센터의 운영 방안, 센터와 기존에 심의를 주관했던 지자체의 관계 등 어려운 문제들이 많고 작품 가격 산정의 구체적인 기준, 중개기관 등록 요건 및 수수료 요율과 같은 세부적이면서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있는 부분들도 이견이 크다. 아마도 공공부문의 요율을 상향 조정한다는 내용 외에는 모두 문제시된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논란은 결국 공공 장소에서의 미술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문광부 포럼에서 드러났듯이 사실 기존에 미술장식품을 주도해 온 미학 개념은 개인주의, 혹은 사회계약의 틀을 맴돌고 있다. 건물에 세워지는 작품은 건축주와 작가의 사적 계약에 근거하며, 그것이 공공성을 획득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인 관객들의 반응까지 포함하는 시장에서의 자율적인 조정의 결과이지 국가 기관이 개입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품의 이전이나 처분과 같은 소유권행사에 해당하는 문제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개정안이 사적인 창작과 작품 소유를 배척하기 위해 시도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적인 계약 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들, 가격기구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때문에 공공성 개념을 적용하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품 설치 장소와 관련된 부분이 대표적이다. 현재 많은 미술장식품들이 건물 주출입구 주변에 옹색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문패조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데 이는 토지경계선과 관계된 제한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작품을 기증하지 않으면 사유지 내에 설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제 장소를 찾지 못하고 불필요한 곳에 설치되고 있으며, 시민들의 접근도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또한 작품 관리, 설치 후 관객의 반응을 모니터하고 홍보하여 연구의 자료로 활용한다든가 하는, 공공영역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제들은 지금과 같이 각각의 경우들이 뿔뿔이 흩어진 채로 체계적인 정보수집도 불가능한 상태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공공성이 좋은 사례들을 확장해 나가면서 비로소 창조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작가의 독립적인 창작과 건축주의 사적인 소유 등 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유주의적 신화에 빠져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는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반응은커녕 ‘시각공해’라는 여론에까지 직면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각종 세부적인 문제들을 두고 갈등이 불필요하게 확산되는 것보다는 우선 새로운 시안이 기존 형태의 미술장식을 그 안에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공공미술의 본 궤도에 진입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의미에서 공공부문에 선도적인 역할을 요구해야 하고 미술인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사실 외국의 경우 공공미술은 그 이름이 의미하듯 공공부문에서 먼저 시작된 것에 반해 우리의 경우에는 미술장식이라는 이상한 이름 하에 민간 부문에 전면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공공미술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공공부문 요율을 1%로 상향 조정하는 것 이외에 도로, 항만, 신도시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에까지 그 대상을 확대해야 하고, 새로운 실험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장치를 요구해야 한다.
본 정책시안의 주된 목적이 ‘협소한 장식 개념에 한정되어 있는 건축물 미술장식제도를 공공미술제도로 전환’하려는 것인데 반해 세부 내용은 상당 부분이 기존의 미술장식품 개념에 얽매여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중개업체 등록제의 시행이라든가, 민간건축주의 부담을 덜기 위한 새로운 요율제 등은 모두 기존 미술장식품 제도가 양산한 비리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행 이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공공미술센터의 경우도 현재로서는 주로 물리적인 작품의 설치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사업 진행 및 관리가 주된 업무가 될 전망이다. 이런 제도 하에서 길거리의 퍼포먼스나 거리의 행사, 주민 자치 토론 프로그램의 조직, 대안 화폐의 실험과 같은 갖가지 창조적인 공적 개입 프로젝트가 공공미술제도의 지원을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정책의 구상과 추진에 있어서 부딪히는 현실적 고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그와 같은 제도정비가 형식적 관점에 갇힐 경우 오히려 공공미술의 맥락을 협소하게 규정함으로써 그 용어를 하나의 장르와 같은 것으로 전락시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의 논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여부는 미술인들에게 21세기 문화지형의 창조를 위한 하나의 중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순수예술의 위기와 같은 염불을 외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문제들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시민사회의 성숙도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의미 있게 하는 지름길일 것이다.